
(내가 먹고싶은 것들..)
해외에서 지내면서 가장 힘든 것 중 하나가 음식에 대한 부분이다.
특히나 외국인과 지내면서 가장 신경써야 될 부분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우리가 즐겨 먹는 음식과 조미료들의 향이 참 강하기 때문이다.
몇일전 이사를 온 나도 외국인 룸메이트때문에 어쩔 수 없이 자의반 타의반 셀러드를 먹고 있다.
이젠 너무나 익숙하고 많은이들이 가벼운 식사대용으로 즐겨먹는, 다양한 종류의 채소를 섞어 기름을 대충 뿌리고 소금 혹은 식초를 곁들여 먹는
셀러드가 바로 오늘 이야기 해 볼 주제다.

다들 잘 모르겠지만 앞서 설명한 다양한 종류의 채소를 섞고 기름과 식초로 간을 하는 요리는 100퍼센트 이탈리아 요리라고 한다.
유럽 여행을 하다보면 어디든 쉽게 식당 메뉴에서 볼 수 있는 셀러드는 사실 이탈리아 반도에서 건너간 요리책들과 요리사들을 통해서였다. 그러한 것들을 통해 야채를 익히지 않고 먹는 방법들이 물건너 갔는데 그 뿐만아니라 이름까지 배워갔다고 한다.

(보나 스포르차)
1518년에 폴란드의 왕 지그문트 1세와 결혼한 보나 스포르차는 시집을 가면서 폴란드에 수프용 채소와 상추를 전파했다고 한다.
이 이야기의 진위여부를 떠나 확실한 것은 여전히 오늘날에도 수프용 채소를 폴란드어로 ‘이탈리아의 채소’ 라고 부른다는 사실이다.
샐러드뿐만 아니라 당근, 완두콩, 아스파라거스, 호박, 꽃양배추를 가리키는 폴란드 단어들은 모두 이탈리아어에 어원을 둔다고 한다.
익히지 않은 채소 사용법의 기원을 찾기 위해선 음식 문화 자체가 채소를 기본으로 했던 고대 로마 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우리가 가끔 마트에 가면 보이는 길쭉한 상추가 있다.

(로마상추)
이걸 영어식으로는 로메인 상추(romain lettuce) 라고 이야기 하는데 의미가 로마 상추(lattuga romana)란 뜻이다. 이름이 그렇게 붙은 이유는, 상추가 로마군의 수송 물자 가운데 으뜸가는 품목이었기 때문이다. 병사들의 체력을 제대로 활용하기 위해서는 이들에게 충분한 식량을 보급할 필요가 있었다.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중세에서 나폴레옹 시대까지는 패전국의 자산을 탈취하는 것이 보통이었지만, 고대 로마인들은 야영지를 구축하고 자신들의 생계유지에 필요한 물자를 공급하기 위해 도로를 닦았다. (그러한 이유를 넘어 로마인들은 과도할 정도로 길에 집착했다. 완변한 길은 물자운송과 정보이동을 가능케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로마에 남아있는 아피아 가도만 봐도 얼마나 길을 신경써서 닦았는지 알 수 있다.)

(과거 로마 군대의 야영지 모습)
로마인들의 야영지를 특징짓는 것은 카르도(북문과 남문을 가로지르는)와 데쿠마노(동서를 가로지르는)의 교차지점 그리고 드넓은 상추밭이였다고 한다.
영양가 높은 채소였지만 동시에 아프로디테의 연인이자 향기로운 여인 스미르나의 아들이었던 아도니스에게는 성스러운 식물이었다고 한다.

(아도니스의 죽음)
신화에 따르면 아도니스는 침대처럼 깔린 상추 위에서 목숨을 거두었다고 한다. 우리가 한식당에서 보쌈을 얹어먹는 상추의 느낌과는 차원이 다른 느낌이다. 최근 연구 결과에 따르면 로마 군인들은 상추밭 외에도 포도밭을 만들었다고 한다. 서기 3세기에 어떤 물자보관 책임자가 상황을 지켜보다가 와인을 무거운 항아리에 담아 어렵게 옮기느니 차라리 야영장 근처에 포도를 심는 것이 훨 씬 수월하겠다는 생각을 떠올렸던 것이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그렇게 해서 276년부터 282년까지 로마의 황제였던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와인을 멀리서 어렵게 공수하는 수고를 덜고 언제든지 손쉽게 마실 수 있도록 병사들에게 항상 포도 묘목을 가지고 다니라고 지시했다고 한다. 현재 헝가리, 프랑스, 스페인, 크로아티아에서 자라는 무려 78개의 포도 품종이 고대 로마의 직계 후손들이다. 그뿐만 아니라 오늘날 가장 중요한 포도주 생산지들 가운데 몇몇은 로마 시대에 로마군의 야영지였던 곳이다. 대표적인 곳인 프랑스에서 샴페인을 만들어내는 지역이라 할 수 있겠다. 상추도 이와 비슷한 맥락으로 이어져 왔던 것으로 보인다. 심지어 오늘날까지 명맥을 유지하고 있는 몇몇 야생 상추의 형태를 연구, 추적하다 보면 로마 군인들이 야영했던 장소를 찾아낼 수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다.

상추에 대한 유럽인들의 사랑은 아쉽게도 1000년이후 시금치의 폭발적인 인기로 사라지고 만다.
아랍인들에 의해 페르시아로부터 보급된 시금치는 향후 두 세기에 걸쳐 유럽 전역에 퍼지게 된다.

(카르초피)
그리고 고대 로마인들은 몰랐지만 1400년대에 먹기 시작해서 지금은 너무나 익숙한 채소가 바로 카르초피이다(삶아묵고 튀겨묵고).
못먹어본 사람은 있어도 한번 먹은 사람은 없다고 이야기되는 나의 최애 채소라 할 수 있겠다.

그리고 1500년대의 요리책에 강낭콩과 꽃양배추가 등장하기 시작했고 이시기쯤 중세에 향료로 많이 쓰이던 회향 이파리의 발전된 형태로
회향 줄기가 등장하기 시작했다. (독특한 향으로 입가심으로 많이들 씹었다고 한다.)

비슷한 시기에 아랍인들이 시칠리아와 스페인으로 수입해 들여오는 것이 바로 가지다. 문헌에 나타나기 시작한 것은 1200년대와 1300년대로 스카피(르네상스 요리사)가 사용하는 이름 ‘mela insana(건강하지 못한 사과)’, ‘pomo sdegnoso(자격 없은 열매)’가 잘 드러내듯이, 당시 가지는 아직 믿음직스럽지 못한 채소였다고 한다. 그 뒤로도 가지는 계속해서 의구심을 불러일으켰고, 유대인들의 식재료였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어쨋든 항상 뒷전으로 밀려나 있었다.

(펠레그리노 아르투지)
17세기 한 저자는 “가지는 하층민 혹은 유대인들이나 먹는 음식이다” 라고 기록한 바 있다.
가지의 재평가는 펠레그리노 아르투지의 시대에 와서야 이루어진다. 아르투지는 가지가 “바람이 든것도 아니고 소화불량을 일으키지도 않는 만큼, 과소평가할 수 없는 채소”라고 설명한다. 사실 빅토리오 엠마누엘레 2세가 땅을 통합했다면 아르투지는 음식문화 통합을 위해 발벗고 나섰던 사람으로 평가된다.
다음화는 그에대해 알아보며 나머지 채소들의 역사도 따라가 보도록 하겠다.
사진 및 출처 : 구글 및 서적